琢光苑(탁광원: 光을 다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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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사진기 및 사진촬영가에 대하여

사진출처 : pngwing


물리학적으로 사진(寫真 또는 光畵, Photograph)은 물체에서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感光性)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 즉 광화상(光畵像)을 말한다. 사진은 보통 사진기로 만들어지는데 사진기는 빛을 모아 사진 필름이나 CCD 또는 CMOS와 같은 이미지 센서에 초점을 맞추어 상을 맺히게 한다. 그리스어의 'photos'(빛)와 'graphien'(그리다)에서 유래한 말로 1839년 존 F.W. 허셜 경이 처음 사용하였다.

한국어에서 '사진'의 뜻은 아래와 같다.
1. 사진기로 대상의 영상을 인화지에 찍어 내는 기술.
2. 인화지에 찍힌 피사체의 영상.
3. 이러한 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는 예술의 한 분야 등의 뜻을 가진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사진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진사(寫眞師), 예술 활동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사진작가(寫眞作家), 사진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을 사진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원
사진은 포토그라피라는 그리스어에서 기원(起源)되었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도 빛을 평면에 투영(投影)하려는 시도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6세기 무렵 화가(畫家)들은 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장치를 이용했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의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 반대편 벽에 외부 정경의 역상(逆像)이 맺히게 하는 장치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카메라의 원형(圓形)이지만 아직 빛을 물체에 정착시키는 기능이 없었다. 이는 당시에 회화(繪畫)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는데 초기에는 지금의 핀홀카메라처럼 렌즈가 없는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보다 선명한 화질을 얻기 위해 렌즈를 부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처럼 빛을 통해 상을 맺히게 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실루엣 초상기법(profilograph)라고 부른다.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프리즘을 사용하여 그리는 대상과 현재 자신이 그리는 것을 동시에 보게 하여 그림을 그릴 때 도움이 되었다.

부유한 평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회화의 수요는 늘어났지만 실력 있는 화가들은 많지 않았다. 이 상황에 자연과학의 진보(進步)가 겹쳐 맺혀있는 상들을 영구적으로 고착(固着)시키는 법을 찾고자 했다. 독일인 하인리히 슐츠(Heinrich Schultz)에 의해서 빛의 노출에 따라 질산은의 색깔이 변하는 화학적 반응이 발견되었고 영국인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ewood)는 이런 발견을 토대로 빛을 물체에 정착(定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질산은 용액에 담근 종이나 가죽을 카메라 옵스큐라에 장착(裝着)하여 상을 물체에 일시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끝내 상을 영구적으로 정착(定着)시키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성공직전에 막히고 만다. 웨지우드는 실험들을 통해 카메라 개발(開發)의 원칙을 세우게 된다.

최초의 사진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영된 영상을 감광판(感光板)으로 포착해 영구적으로 상을 물체에 정착시킨 최초의 사람은 프랑스의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였다. 니에프스는 유태의 비투먼(bituman, 역청)이라는 천연 아스팔트가 빛의 노출에 따라 굳는 성질을 이용해서 8시간의 오랜 노출 끝에 1826년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본 조망’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진을 탄생시킨다. 그는 이것을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하였는데 헬리오그래피는 태양광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노출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광원(光源)이 이동하게 되었고 상업화는 되지 않았다.

사진술 연구(寫眞術硏究)에 큰 관심이 있던 프랑스인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는 니에프스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켜 은도금 동판과 요오드를 이용해 1837년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즉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다게레오타입은 사실상 인류 최초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노출시간(露出時間)과 선명한 결과물을 기반으로 상업화에 성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교적 짧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찍기에는 길었고 때문에 건축물을 주로 촬영했다. 카메라와 현상 장비가 비싸기도 했고 같은 사진을 복사(複寫)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사진을 그림으로 복제(複製)한 뒤 화가가 사람이나 마차와 같은 것들을 그려넣고 채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1840년 다게르는 새로운 카메라를 개발하였는데, 20배 밝은 개량 렌즈와 감광판 도금을 통해 선명한 명암(明暗)을 표현했으며 노출시간이 1분 정도로 축소(縮小)되었다.

1841년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금속을 원판 재료로 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종이 인화법(印畫法)인 칼로타입(calotype)을 발표했는데 이는 음화 상태로 감광판(感光板)에 영상을 포착해 여기서 양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서 이를 통해 대량의 복제를 가능케 했다. 하나의 음화(陰畫)에서 수많은 양화(陽畫)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늘날 사진술의 개념은 탈보트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칼로타입은 부드러우면서 선명하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유화적(油畫的)인 편안함을 주었다. 때문에 다게레오타입은 기록을 칼로타입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메라와 사진의 보급
이후 본격적으로 카메라와 사진이 보급(普及)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관한 연구와 성과들이 지속되었다. 사진의 원판(plate) 같은 경우에는 1851년 영국인 스코트 아처의 콜로디온 습판의 발명, 1871년 매독스의 젤라틴 건판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1889년에는 이스트먼 코닥사에서 셀룰로이드를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제조한 롤필름(roll film)을 생산해서 판매(販賣)하기 시작했다. 당시 코닥사는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광고를 앞세우며 시장에 진입했다. 사람들은 이제 사진만 찍으면 되고 현상은 코닥사에 맡기면 되었다. 이렇게 사진 현상까지 대신 해주는 기업이 등장하면서 사진 현상을 위한 복잡한 도구를 개인이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누구나 쉽게 사진 촬영(撮影)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1925년 작고 가벼운 라이카 카메라의 등장으로 카메라의 휴대성(携帶性)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로서 사진은 이제 전문가(專門家)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이 되었고,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장소에서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기술적인 발전 덕분에 스냅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 대표적인 사진 작품으로는 앙리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있다. 20세기 이후에는 컬러 필름이 등장했고 카메라는 자동 초점(焦點) 기능과 자동 노출 기능 등과 같은 기술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빛을 이미지 센서로 받아들여 디지털 정보로 기록하는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필름 카메라의 시대가 저물고 사진과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더욱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 경부터 컬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생겼다.

사진기(寫眞機) 또는 촬영기(撮影機) 혹은 카메라(Camera)는 빛을 이용하여 그림을 촬영하여 이미지를 기록하는 도구이다. 이렇게 촬영되어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진이라 한다. 촬영된 이미지를 한 장씩 인화(印畫)하여 스틸 사진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여러 장의 촬영된 이미지를 이용하여 영화와 같이 동영상(動映像)을 제작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가시광선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엑스선 촬영, 적외선 촬영(赤外線撮影), 자외선 촬영(紫外線撮影)과 같이 전자기파 영역의 비가시광선(非可視光線)을 이용하기도 한다.

역사 : 영어의 카메라라는 말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함)에서 온 용어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형은 어두운 공간의 한 쪽 벽면에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의 반대 쪽 벽면에 카메라 외부의 풍경을 투사시켜 개기일식(皆旣日蝕)을 관찰할 때 이용하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考案)하였다고 했지만 게른새임의 설명은 베이컨이 알고 있었다고 하고 일식(日蝕) 등을 관찰했다고 한다.또 포르타가 1558년 자연의 마술이라는 저서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기(寫眞機)는 독일의 요한 잔에 의해 1685년 개발되었으며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는 사진기가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까지 약 120년 전의 일이다. 최초의 사진기들은 잔의 발명품과 유사한 것들로 촬상부(撮像部)가 있는 상자를 앞뒤로 이동시켜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미지 기록을 위해 감광판을 빛에 노출시키는 방식이었다. 1839년 구리판을 이용한 루이 다게레의 다게레오타이프 촬영기술이 발명되어 대중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1841년에는 윌리엄 폭스 탤벗이 종이에 이미지를 기록하는 캘러타이프 촬영기술(撮影技術)을 발명하였다.

최초로 인화된 사진은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가 루이 다게레와 공동 제작한 사진기를 이용하여 1826년 촬영한 것이다. 최초의 사진은 은과 석회의 혼합물로 촬상하여 구리판에 정착시켜 인화(印畫)하였다. 1850년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가 콜로디움을 이용한 습식 촬영술을 발명하였다. 이 방식은 이동할 수 있는 작은 암실에서 콜로디움 막을 이용하여 유리에 촬상하고 인화하는 것이었다. 습식 판을 이용한 촬영은 복잡한 촬영술이었지만 19세기 중엽 습식 촬영술인 엠블로타입 촬영술과 틴타입 촬영술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사진기는 역사에 많은 역사를 끼쳤는데 사진기를 통해 참혹(慘酷)한 현실을 전달한다는 것과 같은 거로 말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서는 할당량 미만의 고무를 채집(採集)할 때 가혹한 학대(虐待)를 했고 어떤 사람이 이를 사진기로 찍어 세상에 알렸다. 이를 통해,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서 그런 짓을 벌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휴대 전화(携帶電話)에 사진촬영기능이 추가됨에 따라 사진기는 점점 발전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구조 : 사진기는 가시광선의 빛과 함께 또는 전자기 스펙트럼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한다. 카메라는 빛을 받아들이는 집광부(렌즈)와 받아들인 빛을 이미지로 담는 촬상부(바디), 그리고 여러 가지 상태를 조절하는 부품(셔터, 조리개 등)들로 이루어져 있다.

카메라 렌즈
집광부(集光部)는 빛을 받아 들여 촬상부에 상이 맺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바늘구멍 사진기처럼 단순한 작은 구멍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다중 렌즈를 이용하는 복잡한 것까지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일반적인 사진기의 집광부는 렌즈와 조리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료(明了)한 상을 얻기 위해 렌즈의 거리를 조절하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집광부는 일반적으로 사진 렌즈라 부르기도 한다.

촬상부(바디)
촬상부(撮像部)는 집광부로부터 들어온 빛에 의해 생긴 상이 맺히는 부분이다. 필름 카메라는 이 촬상부에 감광성이 있는 필름을 놓아 촬상하고 이를 현상 및 인화하여 사진을 만든다. 디지털 카메라는 촬상부에 빛의 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장치 (CMOS, CCD 등)를 놓아, 전기신호로 바뀐 디지털 이미지를 여러 형식의 이미지 파일로 저장매체에 저장한다.

조절장치
카메라에는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여러 종류의 조절장치(調節裝置)가 부착되어 있다. 집광부(集光部)의 구멍크기를 조절하는 조리개와 빛을 받아들이거나 차단하는 셔터 등이 대표적이다. 밝은 곳에서는 조리개를 좁혀 빛의 양을 줄이고 어두운 곳에서는 조리개를 열어 빛의 양을 늘리며 셔터 스피드의 조절로 적당한 촬상(撮像)이 가능하다. 셔터의 속도를 빠르게 하면 운동선수의 빠른 움직임을 정지화면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그 밖에 어두운 곳에서 촬영하기 위한 플래시, 촬영할 대상을 미리 살피는 뷰파인더와 같은 장치가 기본적인 조절장치이다. 이 외에도 연속촬영기능(連續撮影機能) 파노라마 촬영기능 등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진은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感光膜)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 물체로부터 오는 광선을 사진기 렌즈로 모아 필름, 건판 따위에 결상(結像)을 시킨 뒤에 이것을 현상액(現像液)으로 처리하여 음화(陰畫)를 만들고 다시 인화지로 양화(陽畫)를 만든다.

물리학적으로 사진의 정의(定義)를 설명하면 '물체에서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을 말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일반적으로 사진은 사진기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사진기(寫眞機)는 빛을 모아 필름이나 CCD[5] 또는 CMOS[6] 같은 이미지 센서에 초점을 맞추어 상을 맺히게 한다.

사진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진사(寫眞師), 예술 활동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사진작가(寫眞作家), 사진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을 사진가(寫眞家)로 분류하기도 한다.

초기 사진기의 프로토타입은 카메라 옵스큐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존부터 상을 그대로 재현해내어 회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준 물건이긴 하지만 그냥 회화의 스케치를 제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 전체를 그대로 옮겨서 재현하려는 구상(構想)은 있어왔고 19세기 들어 광학기술(光學技術)과 화학의 발달로 이를 실제로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발명가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가 10년간의 연구를 통해 드디어 1826년 세계 최초로 사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 그의 사진현상법(寫眞現像法)을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했다. 문제는 한 장을 찍는 데에 무려 6~8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는 인물사진(人物寫眞)을 찍을 수 없었고 풍경사진만 찍었다.

그 후 니에프스와 함께 연구를 한 화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가 기술을 개량해 1839년 좀 더 발전적인 사진현상법(寫眞現像法)인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을 발표했다. 이는 은판사진법(銀板寫眞法)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아직 사진의 특성인 복제(複製)와 인화의 개념이 도입(導入)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 문서에 있는 그가 죽기 직전인 1849년 남긴 유일한 사진도 바로 이 다게레오타입으로 찍힌 사진이다.

같은 시기(1835년)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은 칼로타입(Calotype)을 발명했는데 이는 종이인화법(talbotype)이라고 해서 현대 사진과 유사하게 감광처리(感光處理)된 종이를 이용한 인화의 개념을 등장시켰고 본격적인 복제 가능한 사진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진의 시초(始初)라고 할만하다. 초기에 엄청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여러 연구와 노력으로 1840년대 초반에 수십 분 이상이던 노출 시간을 수십 초가량으로 줄이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1849년 죽기 전에 쇼팽은 운 좋게 사진을 찍은 경우이다. 때문에 당시 인물 사진은 모든 게 세팅된 스튜디오에서 찍었으며 오랫동안 가지런히 포즈를 잡고 찍는 경우가 많았다.

1851년 영국의 프레드릭 스콧 아처에 의해 개발된 습판사진술(collodion process)은 사진의 획기적인 개량을 가져왔다. 이것은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술이나 톨벗의 종이인화법보다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기여하였고 또한 음화(陰畵)에서 양화(陽畵)로 인화하는 과정도 간략화(簡略化)시켜 사진표현 상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발명이었다. 이미 은판사진이나 종이인화법에 의한 초상사진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나 습판사진술(濕板寫眞術)의 출현으로 한층 더 유행을 자극하여 1850년대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1888년 코닥 사의 조지 이스트먼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의 개념인 롤 필름을 발명해냈다. 당시 25달러짜리 코닥 필름이 들어있는 코닥 1호 사진기에는 100장의 필름이 들어있었는데, 100장을 다 찍고 10달러와 함께 코닥 사에 우편을 보내면 사진을 다 인화(印畫)해주고 새 필름을 넣어주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로써 현대적인 사진이 완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코닥사의 필름을 뤼미에르 형제나 에디슨 같은 초기 영화 제작자(映畵製作者)들이 사용함으로써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컬러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大衆化)되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세계 최강의 국가원수라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세계 최초의 컬러 사진이 1861년에 찍혔는데 컬러 사진을 찍은 미국 대통령은 그로부터 50여년은 더 지난 후에야 나왔다. 나라의 권력을 가진 그것도 미국 같은 엄청난 부자 나라의 권력을 가진 고위층(高位層)들조차 컬러 사진을 찍기는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중반에 찍힌 사진들의 상당수도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黑白寫眞)이 매우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이후로도 기술 발전이 이뤄졌음에도 본격적인 컬러 사진의 대중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진 촬영은 가능했으나 현상이 비싸고 플래시 기술의 문제로 특별한 순간에만 쓰는 사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윌리엄 이글스턴이 유명해진 이유도 이런 컬러 사진의 대중화랑 관련이 있다.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사진의 기본틀은 유지되어 왔으나 21세기에 들어선 직후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도래(到來)함으로써 사진은 기존의 필름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사진으로 분화(分化)되게 된다.

디지털 사진이 화소성능(畫素性能) 향상과 더불어 아날로그 사진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상을 얻을 수 있고 아날로그 사진보다도 복제와 재생산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어 현재로서는 예전의 필름 사진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아날로그 사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색채나 질감(質感)을 중시하는 마니아층의 수요가 있어 그 존재 가치가 완전히 퇴색(退色)되지는 않을 듯하다.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발전사는 대충 이러하나 예술적인 측면이나 기법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발전상은 다양하고 복잡(複雜)하게 전개되어 왔다.

사진기가 조선에 처음 등장(登場)했을 때는 사진 찍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자기와 똑같은 모습이 종이에 찍혀 나온다'는 것에서 기원하는데, 때문에 사진기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밑에도 나오지만 이는 전 세계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反應)을 보였다. 참고로 상기한 한국의 최초의 사진을 찍은 사신들은 거부감(拒否感)을 나타낸 게 아니라 매우 신비(神祕)로워하며 러시아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그중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이 작은 것에 내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무척이나 경외(敬畏)로워하였다고 한다.

개화기(開化期) 조선에 사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다 아이를 잡아서 그걸로 현상액(現像液)을 만든다는 괴담까지 나돌다가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 안 잘린 모습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폭발적(爆發的)인 인기를 끌게 된다.

영혼(靈魂)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구한말의 사진을 보면 사진 속 사람들의 눈빛이 매우 강렬하단 인상(印象)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이 눈을 통해 왕래했다는 믿음 때문에 눈을 일부러 강하게 뜨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전 세계 어디서나 그랬고 심지어 유럽이나 미국과 캐나다 같은 북미 일부 지역 시골에서도 나타나던 일이다. 19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인 압뒬 메지트 1세(1823~1861)에게 프랑스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압뒬 메지트 1세는 "내 사진을 찍고 싶다면 찍어라. 그 대신 짐은 사진을 찍은 자의 목을 원한다."고 하여 사진사를 당혹(當惑)스럽게 만들고 사진을 끝내 안 찍은 일화도 있다. 결국 20여년이나 있다가 압뒬 하미트 2세가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도 압뒬 하미트 2세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거부하다가 몰카처럼 마차에서 내리는 걸 서둘러 찍다가 한 소리 욕먹었지만 허락을 맡아 인화를 하여 사진을 전해준 것이다. 그 밖에도 19세기 아프리카나 중남미, 아시아 각지에서도 무턱대고 사진을 찍으려던 백인들이 구타당하거나 사망하고 사진기가 박살나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뿐만아니라 유럽이나 미국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로 사진 찍는 걸 미신적으로 재수 없다고 해서 거부해 20세기 중반까지도 외면하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카메라로 혼을 봉인하는 공포 게임 영 제로가 나왔다.

다만 이건 영화가 나올 때도 벌어진 일이다. 1890년대 흑백영상(黑白映像)을 촬영하던 촬영기사들도 제법 이런 수난을 겪었다. 유명한 사례가 바로 니콜라이 2세 행렬을 촬영하던 촬영기사를 사람들이 집단 구타(毆打)한 사건이다. 사진처럼 똑같이 온갖 말이 많았다.

흔히 한국에서 최초로 사진에 찍힌 사람이 고종(高宗)이라느니 누구라느니 말이 많지만 실제로 한국 최초로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186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러시아 공사관 등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사신(使臣)으로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이나 최초의 사신단 단체 사진 같은 것이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 처음 찍힌 조선인의 사진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 시절 1871년 미합중국 해군이 찍은 조선군 포로 사진이다. 고종황제(高宗皇帝)는 1884년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이 훗날 천문학자가 되는 미국의 퍼시벌 로웰이었다.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는 알레베크 사진엽서로 1899년 프랑스 우체고문인 클레망세(E. Clemencent)가 한국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판매하면 재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의를 하여 대한제국정부(大韓帝國政府)가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가 촬영한 사십여 장의 궁궐과 풍속 사진을 엽서로 제작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 48장으로 여러 가지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어 구한말 풍속사(風俗史)에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프랑스로 가져가 인쇄하여 제작하였으며 1900 파리 엑스포 때 한국관 기념품으로 팔았다.

지금도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같은 터부가 강한 문명권(文明圈)에 사는 주민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고 여겨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고 한다. 사진기가 널리 쓰이는 터부가 강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저런 미신을 믿지는 않아도 왠지 찜찜해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관광객(觀光客)들이 무턱대고 찍다가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다가 집단구타라든지 폭행을 당하고 사진기가 박살나든지 경찰까지 나타나 필름을 압수당하거나 유치장 신세로 상당한 벌금(罰金)을 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슬람권에서도 여성을 찍을 때 조심하는 게 좋으며 차도르나 부르카 차림이니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하고 멋대로 찍다가 분노한 해당 여성들이나 남편에게 맞을 수 있다. 예멘에서 부르카차림으로 양이나 염소를 몰던 여성들을 무단으로 사진 찍던 호주 사진작가가 그 여성들에게 몽둥이로 집단 구타당하던 일이 2000년대 중순에 벌어졌던 일도 있다. 당연히 나중에 달려온 경찰도 왜 그러기에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찍었냐고 그 사진작가를 탓했다. 다행히 그 사진작가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비슷하게 이런 사진 찍던 미국인도 아랍지역에서 목축(牧畜)하는 여성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가볍게 타박상을 당한 사건이 있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온 이들은 반드시 현지인 허락(許諾)을 맡고 사진을 찍으라고 거듭 강조한다. 사실 인물 촬영에 대한 인식은 국가별로 천차만별이라 가령 우즈베키스탄은 여기도 일단은 이슬람권이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찍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다.(물론 경찰, 군인은 제외) 하지만 전 세계에는 무작정 찍으려 하면 좋게 보지 않는 지역이 더 많다. 국내에서도 지역이나 시골에 가서 현지인(現地人)을 일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를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욕먹는 경우도 꽤 있으니 주의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찍히는 사람이 찍지 말라면 찍지 않아야 한다. 사실 저런 미신 때문은 아니더라도 초상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양해를 받아야 한다. 그게 어디든 간에 말이다.

사진의 등장은 미술계(美術界)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사실성을 중시하던 기존 고전미술이 어떻게 해도 사실성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맞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미술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急旋回)하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인상파(印象派), 야수파(野獸派), 추상화(抽象畫), 초현실주의같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작가의 독특한 관점, 감정, 생각을 부각시키는 미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진의 극사실성에 도전(挑戰)하는 극사실주의 화풍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실패했다.

본디 사진은 회화의 복제수단(複製手段) 정도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이후 19세기까지 사진기의 원형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스케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진기의 등장으로 인해 상을 옮기는 과정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게 된 것이다.

사진은 또한 판화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회화의 복제기술로서 판화는 18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시민사회(市民社會)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부르주아, 중산층이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회화를 소유(所有)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정밀하기로는 회화를 능가하고 복제하기 편하기론 판화(版畫)를 능가하는 물건인 사진이 등장했으니 어땠겠는가? 값이 저렴한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유산계급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기존에 회화를 다루던 예술가(藝術家)들은 사진의 극사실주의적 재현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예술이라기 보단 단순히 현실을 재현한 기술의 산물이라고 여기고 반발했던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사진술의 발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의 개념, 원형의 벽을 허물게 된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대로 문명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한 복제기술은 '지금', '여기' 밖에 없는 일품 일회성의 오리지널에 대한 신화(아우라)를 깨트리고 근대사회의 시민들이 눈뜬 평등의식(平等意識)과 직결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진은 새로운 미학적 사유를 펼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한 예로 롤랑 바르트는 예술로서 사진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개념으로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도입했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 있어서 복제품의 범람(氾濫)으로 오리지널에 대한 관심이 무디어지는 세태를 낳았으며 현대 팝아트의 성립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사진의 등장 이후 사진으로부터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닐 영화 같은 영상물. 레코드, 텔레비전 등 새로운 시대의 대중예술은 처음에는 예술의 복제수단으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각각 예술의 장르로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은 이러한 복제예술(複製藝術)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게 만든 원동력(原動力)이라고 할만하다.

순수사진(Fine art Photography)은 보기에 아름답고 뽀대 나는 사진을 찍으려는 상업 사진쪽과 달리 예술적인 사진을 찍으려 한다.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존 디볼라(John Divola), 프란체스카 우드먼(Francesca Woodman), 신디 셔먼(Cindy Sherman)등등의 미술 사진작가들을 보면 도통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 거라 왜 이게 작품인지 의문(疑問)이 많을 것이다.

예술적 특징
사진은 태생부터가 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런 특성은 기존 회화가 가지지 못했던 표현과 리얼리티를 내세우는 데 적합(適合)하였다. 이러한 사진의 특징은 예술적인 것과 결부되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낳는다.

첫째, 렌즈는 인간의 시야 한계나 인식을 넘어서 현실을 세밀(細密)하고 정확하게 반영한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다. 망원경(望遠鏡)과도 같은 원리로 일반적으로는 보기 힘든 지역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며 인간의 시야를 자유자재로 확장시키고 그것을 실제로 재현(再現)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사진은 모두가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을 현재 시점에서 재생(再生)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하면 리얼리티를 가진 기록 매체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사물의 순수한 객관화(客觀化)와 아직 체계화(體系化)되지 않은 미분화(未分化)된 현실대상이 표현세계에 나타나게 만들며, 그 자체가 현재성을 상징하므로 보는 사람에 있어 감정이입(感情移入)을 용이케 하며 현실에 대한 일종의 대리체험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셋째, 사진은 카메라의 각도(角度)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무한히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변화(變化)에 따라 대상이 갖는 의미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진에 의한 기록적인 재현의 영상(映像)은 실제 사물을 인간이 재현하는 데 있어 기억의 애매(曖昧)함이나 모호(模糊)함을 개선하고 그로 인해 생긴 실제와 다른 개념(槪念)의 재정립을 가능케 한다. 사물에 대한 기호적 의미부여가 실제 사물의 본질(本質)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았을 때 사진이 극단적인 사실주의로서 현실을 재현하게 되면 이런 개념을 설명하기에 용이(容易)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진은 그 스스로가 개념이나 기호로서 작용한다기 보단 개념 기호를 새롭게 갱신(更新)시키는 새로운 기호로서의 본질적인 성격(性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순수사진은 Fine Art Photography로 상업사진, Commercial Photography랑 전혀 다른 사진 분야이므로 상업사진 쪽의 예술과 미술사진 쪽의 예술은 굉장한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둘 다 할 순 있지만 배우는 거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미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상업 쪽으로 갈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상업은 돈, 미술은 명성(名聲). 물론 많은 미술이 그렇듯 한 쪽의 극에 달하면 돈과 명성 둘 다 얻을 수 있긴 하다.

발명 당시에 사진은 기존의 예술과는 차별된 진실성(眞實性)과 사실성, 즉시성 등으로 피사체를 그대로 투영하는 도구로 각광(脚光)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진 기술이 발전하고 사진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와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인식(認識)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모든 예술과 기록이 그러하듯 사진 또한 촬영자의 의지(意志)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진 또한 어느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객체(客體)를 어떠한 구도, 렌즈, 필터, 인화로 사진으로 촬영하는가에 따라서 해당 사진이 품는 메시지가 달라지게 된다. 심지어 동일한 사진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붙이는 단 한 줄의 제목(題目)에 의해서 사진의 의미가 180도로 뒤바뀔 수도 있다.

실제로 사진은 독재자(獨裁者) 또는 독재국가의 선전으로 널리 활용되기도 하고 전쟁의 승리만을 강조(强調)하는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된 역사가 길다. 요즘에는 사진 조작기술(操作技術)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프로필 사진은 기본적으로 포토샵 보정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범죄(犯罪)에 가까운 딥페이크와 가짜뉴스까지 발생하게 되는 등 점차 사진의 진실성은 축소되고 있다. 어찌나 문제가 심한지 객관적인 모델의 외모를 평가(評價)해야하는 오디션에서는 아예 폴라로이드 사진으로만 응시(應試)할 수 있도록 하는 미봉책을 널리 사용할 정도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사건내용을 취재(取材)해야하는 진실보도의 의무가 있는 기자들은 아예 사진보정(寫眞補整)이나 조작을 금지하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다. 촬영한 장소와 시간은 물론 어떠한 사진기와 렌즈, 필터를 사용했는지까지 일일이 기록해서 사진의 정보왜곡(情報歪曲)이 최대한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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