琢光苑(탁광원: 光을 다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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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의 전설’서 건진 추억… 초록의 압박에 시간이 멈췄다[박경일기자의 여행]

 

‘오지의 전설’서 건진 추억… 초록의 압박에 시간이 멈췄다[박경일기자의 여행]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강원 인제 ‘대간령’ 마장터 가는 길미시령 박달나무쉼터서 출발, 소간령 넘어 오솔길 트레킹 만끽전기도 닿지 않는 첩첩산중의 마을 ‘마장터’… 지금은 집 다섯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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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을 넘는 가장 유순한 길

여기, 한때 ‘전설’이었던 길 끝의 여행지가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 진부령(520m)과 미시령(826m) 사이에는 ‘대간령(大間嶺·대관령이 아니다)’ 고개가 있다. 전설은 그 고개 아래에 있는 ‘마장터’에 새겨져 있다. 깊고 아득한 숲길 저편에 신기루처럼 남아있는 마을. 초록의 숲 한가운데 다 쓰러져 가는 굴피집과 초가집으로 남아있는 오지 중의 오지.

대간령 고개는 마산봉(1051m)과 신선봉(1204m) 사이의 낮은 목을 넘는 고개다. 이름난 고갯길인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를 넘어간다고 해서 ‘샛령(새이령)’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이 간(間)’ 자를 써서 대간령이 됐다. 대간령 고개는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개다. 강원 인제 쪽에서 출발하면 먼저 작은 고개 소간령을 만나고 그 뒤에 큰 고개인 대간령이 있다. ‘큰 대(大)’ 자를 썼지만, 대간령은 부드러운 언덕 수준이다. 대간령이 그러니 소간령은 말할 것도 없다. 백두대간을 넘는 데도 길이 순한 건, 이미 인제 쪽 들머리 해발고도가 높아서 표고 차가 적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 잊혔지만 대간령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가장 유순하고 편안한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내륙의 물산과 바닷가의 소금과 생선이 넘나들었다. 백두대간 고개를 걸어 넘던 시절 이야기다. 동해의 소금이며 수산물을 지고 넘어온 이들과 육지의 물산을 가지고 동해로 넘어가던 이들이 대간령 아래에서 쉬어갔다. 거기 주막이 들어섰고 마을이 생겨났다. 짐꾼들이 타고 온 당나귀며 말이 이 마을에서 거래됐다. ‘마장(馬場)터’란 마을 이름은 ‘말을 사고팔던 장이 있었던 터’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마장터 계곡.

 

 대간령 정상에다 쌓아놓은 돌탑.

 

 마장터의 초가집 기둥에 누군가 붙여놓은 이성부 시인의 시 ‘봄’.


마장터에는 육지 사람보다 고성 사람들이 더 많았다. 고성의 소금이며 수산물은 한 발짝이라도 내륙으로 더 들어가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성 사람들은 대간령을 넘어 인제를 지나서 원통까지 드나들었다. 일제강점기 무렵에 마장터에는 서른 가구가 넘게 살았단다. 역사상 가장 북적이던 시절이다. ‘고작 서른 가구’라 코웃음을 치겠지만, 가서 보면 안다. 이 멀고 깊은 첩첩산중에 그게 얼마나 믿기지 않는 얘기인지. 그 무렵 마장터에는 함지박을 만드는 공장과 기차선로 침목 생산 공장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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