琢光苑(탁광원: 光을 다듬는 곳)

반응형

니콘 카메라 기종과 역사배경

Nikon D3000


니콘(일본어: 株式会社ニコン 영어: Nikon Corporation)은 광학(光學)과 영상(映像)에 특화된 일본 기업이다. 주요 제품(製品)으로는 카메라, 렌즈, 쌍안경, 현미경, 계측기, 반도체 노광(露光) 장비 등이 있다. 니콘은 니콘 그룹에 속해있으며 니콘 그룹은 미쓰비시 그룹 계열사(系列社)이다. 니콘은 한때 촬상(撮像) 소자용(素子用) 반도체 제조 공정 생산 수율(輸率)에서 세계 2위의 제조업체(製造業體)이었다.

니콘의 사명을 발음(發音)하는데 있어서는 논란(論難)의 여지가 있는데 니콘의 일본어 발음은 /nikoɴ/이나 영어에서는 종종 /ˈnaɪkɒn/과 /ˈnɪkɒn/으로도 발음한다.

2차대전 이전
니콘광학은 1917년 7월 25일에 3명의 창업자(創業者)에 의해 설립되었다. 창립 후 6년간은 기본적인 광학 렌즈들과 카메라용 주변기기(周邊機器), 쌍안경(雙眼鏡), 현미경(顯微鏡) 등을 생산하였다. 이때 만든 것이 라이카용 Nikkor 렌즈로 50mm 및 70mm 렌즈를 주로 생산하였다. 1937년 8월에 들어서 Nikko 라는 이름으로 50mm F4.5, 3.5 그리고 Nikkor F2.0 렌즈들을 출시(出市)했다. 해당 렌즈들은 비슷한 해에 생산된 캐논의 첫 35mm 카메라용으로 납품(納品)되었고 1947년 중반까지 이를 생산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勃發)했을 때 일본은 여전히 자사의 카메라 및 렌즈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직후 정부 명령에 의해 일본군 최대의 광학기기(光學機器) 납품업체로 변모(變貌)하게 되며 전쟁 말기에는 총 23,000명의 노동자가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위한 쌍안경, 렌즈, 폭탄 지시계창, 조준경(照準鏡) 등을 만들어서 납품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1948년 니콘광학은 전쟁 군수물자의 생산을 포기(抛棄)하고 사명을 니콘으로 개명(改名), 하나의 공장만을 가지고 새롭게 사업을 시작한다. 니콘 렌즈들은 미국의 대중 사진가인 데이비드 더글라스 덩컨에 의해 유럽 시장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덩컨은 도쿄에 머무르며 한국전쟁(韓國戰爭)이 발발하고 그러한 종군(從軍) 사진들을 남김으로써 니콘렌즈의 존재성(存在性)을 각인(刻印) 시켰다. 이때 덩컨이 사용한 카메라는 라이카에 니콘 렌즈를 사용함으로써 여전히 니콘이 서드파티로서의 입지(立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계기(契機)가 되기도 했다.

필름 카메라 시대
19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는 라이카와 칼자이스를 중심으로 한 레인지파인더 카메라가 주류(主流)를 이뤘다. 니콘 역시 Nikon S 라는 카메라를 출시하였으나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로써의 경쟁(競爭)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방식의 카메라 사업에 관심(關心)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니콘은 Nikon F 라는 TTL 방식의 SLR 카메라를 개발(開發)하는데 성공하고 1959년에 이르러 이 SLR 라인업을 공개하게 된다. 이후 30여 년간 니콘 F 시리즈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成功)한 전문 사진가를 위한 SLR로 자리 잡았으며 미국 NASA에서도 사용하게 될 만큼 전성기(全盛期)를 누리게 된다.

니콘은 전문가용 SLR 카메라를 생산하는데 주력(主力)하였으며 렌즈 교환, 뷰파인더 교환, 모터 드라이브 그리고 데이터백 교환(交換)이 가능한 모듈러 카메라 시스템을 구축(構築)했다. 카메라 기기적 측면에서는 렌즈와 카메라간의 노출 정보 호환, 기존의 소모성(消耗性) 전구 스트로보 대신 전자식 스트로보의 개발(開發), 전자식 제어 셔터, 멀티 노출 'Matrix' 메터링 시스템, 빌트 인 모터 필름 장치 등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니콘의 자동초점(自動焦點) SLR 카메라는 미놀타에 이어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출시하게 되었다.

니콘의 첫 AF 카메라인 F3AF는 매우 느리고 둔탁(鈍濁)하였다. 이는 F 마운트가 원래 자동 초점을 염두(念頭)에 두고 만든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후발주자(後發走者)였던 캐논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발 빠르게 대응(對應)하여 전자식 마운트인 EF 마운트로 교체하여 해결(解決)하였고 훨씬 뛰어난 오토 포커스 성능(性能)과 프로 규격(規格) 대응의 조리개 컨트롤 시스템을 탑재(搭載)하여 좋은 시장 반응(市場反應)을 이끌어내었고 결국 1990년대에 들어서 전문가용 카메라 시장의 선도(先導)를 넘겨주게 된다. 이러한 SLR 시장 분위기는 현재(現在)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니콘의 첫 DSLR은 1991년 디스커버리호에 사용할 목적(目的)으로 NASA에 납품한 NASA F4 및 DA-20 액션 파인더, 전자식 구동장치(驅動裝置) 및 렌즈였다. 1990년대 코닥이 디지털 전용 바디를 개발하는 파트너십을 맺기 전까지 니콘은 필름 바디에 디지털백을 연결(連結)하는 방식의 카메라를 생산하였다. 지금 형태(形態)의 바디 센서 일체형 디지털 카메라가 출시된 것은 1999년 니콘 D1이 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니콘 D1은 APS-C센서를 탑재하였고(훗날 이 기종의 이름을 따 DX 포맷이라고 명명됨), 민간시장(民間市場)이 구매(購買)할 만큼 충분한 가격으로 책정(策定)된 세계 최초의 전문가용 DSLR이었다. 이 카메라는 신속(迅速)하게 필름 SLR 카메라를 시장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니콘은 2000년대 초에 들어 일반 소비자용(消費者用) 콤팩트 디지털 카메라인 Coolpix를 공개하였고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전문가(專門家) 및 일반 사용자를 위한 DSLR 라인업을 구축(構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캐논이 1990년대부터 SLR 시장을 선점(先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니콘은 후발주자로써 시장의 입지(立地)를 구축해 나갔다.

2007년에 들어 니콘은 자사 최초의 풀프레임 전문가용(專門家用) 카메라인 니콘 D3를 공개하였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중급 사용자용(使用者用) 풀프레임 카메라인 니콘 D700을 출시한다. 니콘은 이 기종(機種)들을 통해 전문가 및 아마추어 사진가 시장에 새로운 활력(活力)을 불어넣었으며 시장 점유율(占有率)을 조금씩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해당 기종들이 캐논에게서 점유율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경쟁사(競爭社)의 기종들과 비교해서 월등(越等)한 속도, 알고리즘, 고감도(高感度) 저노이즈 성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008년 출시된 니콘 D90은 세계 최초의 영상기록(映像記錄)이 가능한 DSLR 이었다. 이를 통해 니콘은 D3에 영상 기록 기능을 추가한 니콘 D3s를 출시했으며 이후 니콘 D7000, 니콘 D5100, 니콘 D3100, 니콘 D3200등의 기종들을 출시하며 캐논과 함께 DSLR 시장 점유율을 양분화(兩分化)해오고 있다.

니콘의 전략(戰略)은 카메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주변기기에 역시 연관이 돼있다. 1980년대부터 니콘은 스텝 앤 리피트 방식(方式)의 사진 인쇄기인 NSR-1010G를 선보였고 이후 사진 스캐너 및 인쇄기(印刷機) 역시 중점적으로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니콘은 이러한 영향(影響)을 받아 현재에도 각종 산업용(産業用), 의료용(醫療用) 장비 생산을 하고 있다

오늘날 니콘은 사진 업계 및 주변기기에서 막대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고 있으며 주요 촬상 소자용 반도체 제조 기업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니콘은 또한 사진에 관련된 연구(硏究)와 발전을 위한 Nikon Research Corporation of America를 설립하는 등 사진의 이론적 기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메라 업계 최대 라이벌인 캐논이 카메라 뿐 아니라 비디오카메라나 복사기(複寫機), 프린터 같은 사무용 기기 등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과는 달리 니콘은 회사 이름답게 카메라, 현미경 등의 실험용 광학장비(光學裝備), 안경 렌즈, 쌍안경, 스코프, 반도체(半導體)의 노광장치 등 광학 부문 사업만 하고 있다.

이름의 유래는 전신(全身)이던 일본 광학(日本光学, 니폰 코우가쿠)을 줄여서 따왔다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 독일의 광학회사인 차이스 이콘(Zeiss ikon)이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를 벤치마킹하여 Z를 뒤집어서 니콘(Nikon)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일본광학 독음(讀音) 중에 마지막 'n'을 설명할 부분도 없다. 가끔 외국에선 '나이콘'이라 부른다고 '반드시' 나이콘'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그냥 'NIKON'이라는 영문 표기(表記)를 미국 영어식으로 발음해서 그런 것일 뿐 니콘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일본어이며 본사가 일본에 있으므로 일본식으로 니콘(ニコン)으로 발음해야 옳다. 또한 니콘의 한국 법인인 니콘이미징코리아가 한국어 표기를 '니콘'으로 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은 독일의 사례(事例)를 보고 강한 군사력(軍事力)을 위해서는 뛰어난 광학기술(光學技術)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일본 해군은 이를 위해 당시 거대 군수기업(軍需企業)인 미츠비시에 광학 기술 관련 기업을 만들 것을 요청(要請)하게 되고 1917년 미츠비시의 자회사인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가 니콘의 시초(始初)가 된다. 현재도 미츠비시 산하 회사이며 이 때문에 전범 기업(戰犯企業)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군부의 요청으로 생긴 회사라 초기에는 카메라는 만들지 않고 망원경(望遠鏡), 라이플의 스코프, 잠망경 등 군사 목적 광학 기기만 생산했다.(현재도 쌍안경, 라이플 스코프 등은 생산 중) 야마토급 전함에도 주포(主砲)인 18.1인치 3연장 포의 사격통제장치(射擊統制裝置)로 일본 광학의 15m 측거의가 장착(裝着)되었다. 이런 광학 기기는 잘 훈련된 견시들의 손에 쥐어져서 태평양 전쟁 초기 야간전에서 일본 구축함(驅逐艦)들의 악명을 떨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인 연합군 측은 광학 기술 뿐 아니라 레이더를 이용한 초장거리 포격(砲擊)이나 함재기(艦載機) 운용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NIKKOR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일어나기 전 일본광학은 1932년, 사진 렌즈의 브랜드 이름을 'Nikkor'라 명명(命名)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끝나고 군수기업이던 일본광학은 막대한 손해(損害)를 입게 되었다. 결국 1945년 19,000명의 종업원(從業員)을 거느린 회사가 1,700명 남짓한 규모로 축소(縮小)되었다. 생존을 위해 일본광학은 민간 시장 진출(進出)을 결심했고 1946년 회사의 이름을 '니콘'으로 바꿨다. 1948년 니콘 최초 카메라인 35mm 필름 대응 레인지파인더식 카메라(RF카메라) 'NIKON I'이 발매(發賣)되었다. 하지만 평단(評團)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니콘은 카메라 개량(改良)에 착수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계기(契機)로 라이카용 호환 렌즈들이 호평(好評)을 받게 된다. 미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이 한국전쟁을 취재하면서 자신의 라이카 카메라에 니콘 렌즈를 장착(裝着)해 썼는데 이 일로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반열(班列)에 오른 던컨이 니콘 렌즈의 뛰어난 성능을 극찬(極讚)하면서 인지도가 확 올라간 것이다. 1950년 12월 10일자 뉴욕 타임즈에도 니콘 카메라에 대한 호평이 실려 있다. 허나 당시 카메라는 RF카메라, 특히 라이카가 꽉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목측식은 말 할 것도 없고 미러만을 사용한 TLR도 성능으로는 RF 카메라에 비견(比肩)할 수 없어서 펜타프리즘을 장착한 완성형 SLR이 나오기 전까지 다른 메이커는 전부 죽을 쑤고 있었다. 니콘도 SP, S3 같은 RF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반응(反應)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때 만든 S3은 2000년에 실버 크롬 버전이 8천대, 2002년에 블랙 페인트 버전이 2천대 한정판으로 복각(覆刻)되었으며 SP도 뒤이어 2005년에 2500대 한정 발매(發賣)되었다.

1953년 카메라계에는 RF의 걸작 Leica M3가 등장(登場)한다. 포토키나에서 M3를 손에 쥔 니콘의 기술진은 충격과 공포(恐怖)를 느끼고 극심한 좌절감(挫折感)에 빠지는데 그동안 니콘이 해결할 수 없었던 RF의 7대 난제(難題)가 모두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은 RF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보고(報告)를 하였다. 이에 니콘은 RF를 중지하고 SLR에 사활을 걸겠다는 카메라 역사의 중요한 분기(分岐)가 되는 결정을 내린다.

1959년 니콘은 자사 최초의 SLR 카메라 NIKON F를 발매(發賣)한다. 이것이 바로 니콘 F 마운트의 시작이다. 비록 세계 최초의 SLR은 아니었으나 그동안 SLR의 문제점(問題點)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상당수 해결하여 실용적(實用的)으로 쓸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로서 기자들의 많은 환영(歡迎)을 받았다. SLR은 찍힐 사진의 프레임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이 대인기(大人氣)를 얻으면서 점점 RF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플래그십 모델인 니콘 F그레이드, FM시리즈, FA 등을 통해 엄청난 인기(人氣)를 얻게 된다. 특히, 니콘의 세 번째 플래그십 모델인 F3에 가서는 니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니콘의 인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카메라의 대명사(代名詞)로 국내신문사 기자들의 십중팔구(十中八九)가 F3를 애용(愛用)하였으며 이는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사진(遊說寫眞)에서도 확인되고 있다.(후보자들 주위에 도열(堵列)해있는 신문기자들 모두가 F3로 촬영하고 있다) 또한 각종 매체에도 자주 쓰이는 소품(小品)이 된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에어리어88 OVA 에서 NP통신의 종군기자로 나오는 무츠기 고(일명 록키)라는 인물이 사용하는 카메라로 모터드라이브가 장착 된 F3가 등장한다. 록키가 격추(擊墜)당하고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막에 떨어지는 장면(場面)이 있는데 이때 사막위에 덩그라니 놓여진 F3가 홀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는 장면이 클로즈업 될 때 니콘매니아들은 말 못할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유승준 스티브유의 히트곡인 열정(熱情)에 나오는 카메라 셔터소리도 F3에 모터드라이브를 장착(裝着)한 녀석의 샘플링 사운드라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음악(音樂)이나 영화(映畫), 드라마 등 각종미디어에서 접하는 카메라 셔터사운드는 모두 F3에 모터드라이브 장착 된 녀석의 사운드 샘플링이라 내는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이다. 참고로 부산(釜山)의 지역언론매체인 국제신문 사옥 1층 로비에 F3가 유리전시대 안에 보관되어 전시(展示)되어있기도 하다.

80년대부터 새롭게 떠오른 화두(話頭)인 자동초점(Auto Focus, AF)에 대응하는 카메라 회사(會社)들의 선택은 두 종류(種類)가 있었다. AF에 최적화된 새로운 마운트로 바꾸거나 아니면 AF를 기존 마운트에 맞춰 개발(開發)하는 것이었다. 캐논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전자(前者)의 방식을 선택(選擇)하였지만 니콘은 후자(後者)를 선택하였다. 단순히 마운트 결합(結合)이 맞는 것뿐만 아니라 렌즈-바디 작동의 상하위 호환성(互換性)을 갖는 AF마운트를 개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니콘의 엔지니어들은 그야말로 애로사항(隘路事項)이 꽃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개발 지연(遲延)으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실용화(實用化)된 AF시스템 출시의 영예는 미놀타에게 돌아갔다. 사실 최초의 AF SLR 카메라 발매(發賣)의 족보가 좀 꼬이는게 세계 최초로 시판(市販)된 AF SLR카메라는 1981년 발매된 펜탁스 ME F였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전용의 SMC AF 35-70 f/2.8렌즈가 없으면 AF가 동작(動作)하지 않는 반쪽짜리 AF SLR 카메라였다. 다만 다른 K마운트 렌즈를 장착하면 초점(焦點)이 맞았는지 아닌지 판단(判斷)하는 초점 인디케이터의 지원은 얻을 수 있었다. 니콘 엔지니어의 회고(回顧)에 따르면 "그런 식이라면 더 빨리 내놓을 수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런 물건(物件)을 시장(市場)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니콘은 1983년 F3AF를 발매하는데 결국 원통형(圓筒形)의 렌즈 안에 모터를 집어넣는데 성공(成功)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니콘은 이 방식(方式)을 버리고 바디에 모터를 넣는 방식(方式)으로 선회하여 F501을 발표하였다. 참고(參考)로 이 당시 일본정부는 일본 카메라 회사들의 경쟁력(競爭力)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기업들 간의 기술을 공유(共有)시키고 해외 기업체가 일본 카메라 업체로부터 해당 라이센스를 사는 것을 막았다. 당시 대한광학이라는 국내 카메라 업체도 미놀타와 AF 기술 제휴를 하려다 이에 가로 막혀서 목측식 카메라라는 시대에 수십 년은 뒤떨어진 제품(製品)을 내놓았어야 했다.

AF 기술은 플래그십에도 적용(適用)되어 1988년 F4가 발매(發賣)되었는데 보도=니콘이라는 공식(公式)을 성립시키며 대박을 쳤다. 당시 한국에서도 시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는 카메라가 F4인지를 보고 기자(記者)인지 아닌지를 판별(判別)할 정도였다. 그 전 해인 1987년 캐논은 EF마운트로 전환(轉換)하기 위해 FD마운트를 버렸기 때문에 큰 원성(怨聲)을 사고 있던 차였다. 기존의 MF렌즈군을 그대로 활용(活用)할 수 있는 니콘의 인기는 엄청났고 이것은 F5로도 이어졌다.

1999년에는 최초의 실용적 디지털 SLR인 D1을 내놓으며 보도사진계(報道寫眞界)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D1은 니콘 DX 포맷을 비롯 오늘날 DSLR의 여러 기술적 측면을 정한 기념비적(記念碑的)인 모델이다. 물론 디지털에서의 최초는 아니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여러 불편사항(不便事項)들이 있지만 충분히 실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많은 문제점(問題點)을 해결한 최초의 실용적인 DSLR이었던 것이다. 필름을 본사로 보내 현상 후 쓸 수 있는 쪽과 디지털로 바로 송고(送稿)하는 쪽은 보도 속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진기자(寫眞記者)들의 어깨띠는 그야말로 니콘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디지털에의 대응(對應)도 빨랐던 니콘이지만 그 다음 플래그십 모델을 실기하면서 그 위상(位相)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니콘 D1의 성공 이후 캐논이 야심(野心)차게 내놓은 1D는 D1을 크게 상회(上廻)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렌즈와 주변장비(周邊裝備)를 구입한 언론사들로서는 다시 비용지출(費用支出)을 감수하며 캐논으로 넘어가기보다 니콘의 후속기(後續機)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 년 후에 발매된 D2h는 캐논1D에도 성능이 크게 미달하는 망작(亡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캐논이 언론사(言論社)의 니콘 장비를 되사주는 마케팅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결정타(決定打)였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언론사가 캐논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렇게 한번 바뀐 마운트는 비슷비슷한 성능(性能)인 채로는 바뀌지 않으므로 니콘은 D3가 나올 때까지 10년 가까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게 된다.

플래그십에서 밀려버리자 중급기와 보급기(普及機)에서의 싸움도 쉽지 않았다. D100에 이어 보급기 D70, D50이 성공하고, D200과 D80 역시 인기를 얻는 등 개별 모델은 분전(奮戰)을 펼쳤지만 캐논에 비해 발표 간격이 긴 것이 약점이었다. 마치 티거 전차를 비롯한 독일군 무기(武器)의 성격과 비슷했다. 더구나 2000년대 캐논은 또다른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었는데 EF마운트로 전환(轉換)한 후 고급 렌즈를 먼저 현대적인 컴퓨터 설계(設計)로 리뉴얼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리뉴얼되지 않은 구형(舊型)의 니콘 고급 렌즈보다 화질이 좋았던 것이다. 가령 화질에 민감(敏感)한 웨딩사진업계는 90년대부터 이미 보케가 예쁘게 나오는 캐논으로 넘어가 있었다.

반격(反擊)의 시기는 2007년에 돌아왔다. D2h에서 자체 개발 센서 LBCAST로 쓴 맛을 보았던 니콘이지만 자체 개발에의 의욕(意欲)을 버리지 않고 또다른 센서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굉장히 절묘(絶妙)한 밸런스의 센서를 만들게 되는데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비교적 낮은 화소수(畫素數)로 안정적인 저노이즈를 달성한 것이다. 당시까지 디지털은 높은 화소수에 따른 처리속도(處理速度)가 병목이었기 때문에 플래그십은 화소수가 낮지만 연사속도가 빠른 보도용 카메라와 연사는 느리지만 화소수가 높은 스튜디오용 카메라로 이분되고 있었다. 이 이분법(二分法)을 받아들인 캐논은 1.3x 크롭사이즈와 중간 화소수의 고속연사 1D 모델과 35mm 풀사이즈 및 높은 화소수의 고화질(高畵質) 1Ds 모델을 내놓고 있었다. 즉 센서를 35mm 풀사이즈로 하는 한 화소가 많아져 보도사진(報道寫眞)에 쓸 만큼 고속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D3의 센서는 그 허를 찔러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화소수를 확 낮춰버려 고속연사(高速連寫)와 저노이즈 고화질을 달성한 보도사진에서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밸런스를 달성(達成)한 것이다.

D3에 비하면 1D는 크롭화각과 화질에서 떨어지고 1Ds는 연사속도(連寫速度)에서 떨어졌다. 캐논 입장에서는 대응제품(對應製品)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일선 기자들 사이에서 호평(好評)이 나오면서 다시 니콘으로 넘어가는 언론사(言論社)들이 나왔고 니콘은 점유율을 상당 부분 탈환(奪還)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 스포츠 사진기자들은 거의 전부 니콘으로 넘어갔고 일반 사진기자(寫眞記者)들도 반 가까이 니콘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웨딩 사진에 있어서도 최고급(最高級) 스튜디오들은 니콘으로 넘어갔다. 물론 동네사진관들이나 결혼식장 사진관들은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정도 일반화(一般化)되기 시작한 시기에 DSLR을 구입한 곳들이고 기변의 필요성(必要性)이 적기 때문이다. 다만 최고급 웨딩사진에서 선호도(選好度)는 한일 차이도 조금 있는데 일본은 우치다 사진관(寫眞館) 등이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급기 시장에서도 D300은 플래그십에 맞먹는 고성능(高性能)을 집어넣어 히트를 쳤다. 캐논의 두자릿수 바디는 가격(價格)을 좀 더 낮추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D300이 더 우위(優位)를 가져갔다. 또한 이 시기에 즈음해서 과거의 렌즈들을 현대 컴퓨터 설계(設計)로 리뉴얼하고 있다. 새로 나온 14-24는 터무니없이 압도적(壓倒的)인 성능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발표 당시의 "해당 화각(畫角)의 어떠한 단렌즈보다 우수하다"라는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캐논의 24mm 단초점 L렌즈보다 훨씬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어 충격(衝擊)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리고 렌즈의 리뉴얼에 따라 Nikkor 브랜드를 NIKKOR 브랜드로 변경(變更)했다.

2008년 전 세계 DSLR 시장의 35~40%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카메라 시장의 점유율(占有率)은 6~8%. 오타(誤打)가 아니다! DSLR이 아닌 소위 똑딱이 디카의 여명기(2000년대 초반)에는 쿨픽스 시리즈로 시장을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쿨픽스 900에서 시작하여 950, 990, 995 등으로 진화했던 렌즈부와 본체가 수납 시에는 일체형이다가 촬영(撮影) 시 90도 회전하는 형태의 900 시리즈들은 당시 우수한 화질로 호평(好評)을 받았다.

유사한 컨셉이지만 소형 경량으로 휴대성(携帶性)을 중시한 쿨픽스 2500의 경우 셀프 사진을 중시하던 당시 취향(趣向)에 잘 부합하여 한때 국민디카로 사랑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DSLR 전쟁이 격화(激化)되면서 이쪽에는 투자할 여력이 없었는지, 현재의 쿨픽스 시리즈는 아무런 특징(特徵)이 없는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하위 기종들은 OEM 생산품이라는 의혹(疑惑)이 매우 짙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하이엔드 광각줌렌즈의 LX-3 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다시 똑딱이에 대한 관심(關心)이 높아지고 미러레스 카메라가 시장에 폭풍(爆風)을 일으키자 니콘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P7100 같은 하이엔드 똑딱이를 내놓더니 결국 2011년 9월 미러리스 카메라 마운트를 정식 발표(發表)했다. 하지만 지금은 1년 넘게 신제품이 발매(發賣)되지 않으면서 니콘이 버리지 않았는지 의심(疑心)이 들 정도이다.

2017년 기준 니콘이 최대위기(最大危機)를 맞은 상황이다. 부도위기(不渡危機)인데 일단 연초에 희망퇴직(希望退職)으로 1,000명을 퇴직시켰고 변화하는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많은 유저들이 이탈(離脫)해 버리는 등 심각하다. 가장 큰 원인은 캐시카우였던 DSLR의 시장이 쇠락(衰落) 중인데 이를 대체할 제품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소니나 올림푸스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시그마나 캐논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활용(活用)한 미러리스를 만들기에 F 마운트는 너무 낡았고 기술적 난이도도 캐논과 시그마의 전자식 접점(接點)에 비해 상당히 높다. 여러 군데 팔렸던 펜탁스도 DSLR만 만들며 명맥(命脈)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현 모기업 리코는 규모가 큰데다가 나름 흑자를 기록 중이라 니콘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마운트를 미러리스로 전환(轉換)한다 쳐도 라이브 뷰나 동영상기술(動映像技術)이 타사보다 몇 년씩 뒤지는지라 향후 라인업에 상당히 먹구름이 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CP+에서 다른 회사들이 여러 신제품(新製品)들을 공개(公開)할 때 니콘은 단순히 100주년 기념 바디 및 렌즈만 공개할 정도이다. 더군다나 자이스와의 특허전쟁(特許戰爭) 때문에 미국에서 카메라를 못 팔수도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특허 전쟁에 진다면 막대한 적자(赤字)는 물론 자칫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 있다. 아예 후지필름이 니콘 지분(持分)을 구입해서 니콘을 살리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온 상황(狀況)이니 얼마나 힘든지 잘 알 수 있다.

반도체 공정에 핵심적(核心的)인 액침노광 특허를 침해(侵害)했다면서 네덜란드의 ASML를 고소하여 오랜 법정다툼 중에 있었다. 위에 언급(言及)된 자이스와의 공방도 그 맥락(脈絡)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1년부터 관련된 법정공방(法庭攻防)이 시작되었는데 ASML과 특허공유로 합의(合意)하였으나 2009년 특허공유가 만료된 이후에도 ASML이 계속 자사의 기술을 남용(濫用)한다며 다시 소송을 낸 상황(狀況)이다. 그러나 원천기술을 가진 니콘은 이미 시장에서 거의 도태(淘汰)된 것이 현실이며 2018년에는 ASML, 자이스와의 소송(訴訟)에서 패한 것도 모자라 특허도 무효(無效)가 될 상황에 처했다. 반면 ASML은 반도체공정 미세화(微細化)에 힘입어 독점 수준(獨占水準)으로 시장을 장악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중이다.

그러다가 2019년 1월에 자이스-ASML-니콘 3사간의 10년짜리 특허공유(特許共有) 계약이 합의되면서 일단 특허전쟁(特許戰爭)은 막을 내린 상황이다. 자이스와 ASML이 니콘에 약 1900억 원을 일시금(一時金)으로 지급하고 이후 3사는 10년 동안 해당 기술이 들어간 제품 매출액(賣出額)의 0.8%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서로에게 지급(支給)한다는 내용이며 이로써 관련된 모든 국제소송(國際訴訟)들과 고발들을 취하하게 되었다. 결국 원천기술(源泉技術)을 가진 니콘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협상(協商)이 이뤄진 셈이다. 쌍방 로열티라는 애매한 합의에도 그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니콘의 시장 점유율(占有率)이 낮아서 ASML에게 낼 돈보다 받을 돈이 압도적(壓倒的)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EUV로의 세대교체(世代交替)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時點)이며 ASML은 근 25년간 니콘의 기술로 돈을 벌만큼 번 반면 니콘은 EUV 시장에 안착(安着)을 실패했기 때문에 승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냥 최근 소송에서 패소(敗訴)하는 등 암울한 상황(狀況)에 비춰볼 때 생각보다 선방(善防)했다는 정도가 맞을 듯하다. 물론 액침노광 기술이 근시일 안에 구식기술로 전락(轉落)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2020년에는 모든 여건이 최악으로 적용하며 몰락(沒落)의 길을 걷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지를 않으니 카메라의 매출(賣出)은 사상 최악을 찍고 있고 반도체 장비(裝備) 분야에서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인텔은 사업부를 매각(賣却)하고 생산라인을 축소(縮小)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니콘에게 발주(發注)를 넣지 않고 삼성과 TSMC는 EUV 장비를 도입(導入)하고 있어 니콘이 아닌 ASML로 갈아탔고 후발 주자인 중국에 장비를 팔려고 했더니 미중 무역 분쟁(美中貿易紛爭)으로 인해 화웨이와 SMIC가 제재(制裁) 대상으로 떠올라 팔지도 못한다. 결국 2020년 11월 현 시점에서 인원의 10%를 감원하는 구조조정(構造調整)이 확실시 되고 있다. 향후의 전망도 암울(暗鬱)하다. 카메라 시장의 중흥(中興)은 꿈도 꾸기 어려우며 반도체 장비에서 반전을 꾀하기엔 여건(與件)이 좋지 않다.

특수 카메라
1970년대 후반부터 NASA와 계약하여 스페이스 셔틀용, 우주정거장용, 달 탐사용 등 특수 목적 우주(宇宙) 카메라를 공급했다. 여기에는 강한 내구성뿐만 아니라 작동(作動) 중 미세한 불꽃을 일으키거나 가스를 발생(發生)시키면 안 되는 등 까다로운 제약도 충족(充足)하고 렌즈는 태양광을 직접 쬐어도 플레어를 억제해야 한다는 요구에도 대응(對應)한다. 이 중 디지털백을 부착(付着)한 F4 NASA 버전은 세계 최초 DSLR이기도 하다. 니콘으로 수많은 멋진 EVA 사진들이 촬영(撮影)되었으며 오늘날 ISS에서도 니콘 카메라를 사용한다. 척박(瘠薄)한 환경에서 쓰는 군용 카메라도 니콘제가 많다.

*Nikon S-100 : 니콘 슈퍼 8 기종 기반으로 한 비디오 카메라
*Nikon QV-1000C : 니콘 SVC 프로토타입 이후 나온 기종(機種)이다. 스틸 이미지 카메라이며 대략 200대 정도밖에 생산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아남정밀을 통하여 필름전송기 NT-2000A와 같이 들여왔다. 2020년 8월 현재 NICE기업정보에 보면 퇴사자(退社者)가 23명(47.92%)로 약 50% 인원을 감원(減員)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도심공항 타워로 이전(移轉)하였으며 이전하면서 인원을 감축(減縮)한 것으로 보인다. 니콘이 아베신조 정권 집권한 배경 속에서 미쓰비시계열사 하에 여러 군수산업(軍需産業)이나 중공업(重工業)을 바탕으로 거물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극우성향(極右性向) 현직상사가 경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한다.

사진작가(寫眞作家) 안세홍은 2012년 6월 오사카에서 위안부(慰安婦)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기 위해 니콘의 전시장인 '니콘 살롱'을 사용하기로 2011년 12월 계약(契約)했었으나 니콘이 사진전 불과 한 달 전인 12년 5월 위안부 사진전에는 장소를 제공(提供)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通報)한 것이다. 이에 안씨는 소송(訴訟)을 걸었고 (15년 1월 22일) 이에 도쿄지방재판소는 “니콘이 사진전 장소(場所) 제공을 약속했다가 일방적으로 거부(拒否)한 것은 표현활동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정당(正當)하다고 할 수 없다”며 니콘사는 안씨에게 110만엔(약 107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判決)했다. 그리고 계약을 이행하라는 재판부(裁判部)의 결정에 오사카 전시회(展示會)는 니콘이 끝내 거부하지 못하게 되자 기존(旣存)에 1대였던 CCTV를 10대로 추가 설치(設置)하고 입구에 보안검색대(保安檢索臺)를 설치했으며 직원 6명을 배치해 언론사(言論社)의 출입을 막는 등 온갖 방해공작(妨害工作)을 펼쳤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