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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수상자 포토저널리스트 강형원

 

I 윤세영의 사진가 탐방 I

강형원

퓰리처상 수상자  | 포토저널리스트 강형원

/ 윤세영 편집주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 44년, 미국의 주류 언론사에서 포토저널리스트로 활약한 기간이 33년.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강형원”이다. 세계적인 통신사 AP와 로이터(Reuters)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가 취재한 사진 아래 바이라인(byline)은 언제나 Hyungwon Kang 이었다. 영어권의 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 하여도 자신의 이름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 그런 그가 2019년 가을 로이터에서 은퇴 후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의 세 아들과 한국에 뿌리를 둔 재미한인들,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를 한국전쟁, 그전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기억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포토저널리스 강형원, 그가 글로벌한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의 문화와 역사의 장면들이 궁금하다.

1992년 LA 폭동 당시 한인, 퓰리처상 수상 작품 ⓒ강형원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Visual History of Korea

“미국의 전국지 신문, 그리고 세계 최대의 통신사에서 근무하면서 포토저널리스트로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은퇴 후에는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영원히 남을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강형원, 그가 말하는 프로젝트는 바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이었다. 안에서 사는 우리로선 무심하게 인식해온 우리의 오천년 문화유산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그에게는 더 가치 있게 느껴진 것이었을까? 현역시절에도 간간이 한국을 찾았던 그가 코로나19로 힘들던 2020년에 자가격리를 감수하면서까지 귀국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가며 사진작업을 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는 비주얼 스토리 텔러입니다. 그래서 일단 사진으로써 가장 명확하게 이야기가 되는 주제에 접근하고 있어요. 사진을 통해 우리 문화권의 독특한 내용들을 영어문화권에 알리려는 것이죠.”

그는 영어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양쪽언어에 능숙한(bi-literal) 사람으로서 영어권 사고방식으로 한국역사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영어문화권에 알릴 수 있고, 또한 기존의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로이터통신 캐나다 본사에서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캐나다 시민권을 추가로 받았기 때문에 미국과 적대적인 국가도 방문할 수 있다.

“지금 제가 촬영하고 있는 사진을 인터넷에 많이 퍼트려서 기존의 왜곡된 내용들을 바로잡는 (다른 나라에서 올려놓은 내용을 지울 수는 없지만 좋은 콘텐츠로 영원히 가리는) 역할을 꾸준히 하려고 해요. 기회가 된다면 책으로 발행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소장하게 되면 더욱 좋고요.”

그런 일에 앞서 그는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란 제목으로 2020년 8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미주 LA한국일보 지면에 연재를 시작했다.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 2세와 3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려 자부심과 정체성을 찾아주려는 일차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1992년 LA 폭동, 퓰리처상 수상 작품 ⓒ강형원

1993LA폭동 사진으로 퓰리처상 수상

고등학교 3학년 때 취미로 학교 앨범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에 푹 빠진 그는 대학(UCLA)에 진학해서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평균 36면을 발행하는 학생신문에서 뉴스와 스포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렇게 뉴스를 취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문학에 관심이 쏠려 물리학에서 정치학/국제외교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1986년 가을, L.A. Times 인턴으로 합격하면서 외교관의 꿈을 접고 포토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진기자로서 영광은 첫 직장인 L.A. Times에서 찾아왔다. 1992년 4월에 일어난 LA폭동을 취재한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사진은 미주한인들이 상가에서 총으로 무장하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장면이다.

“LA폭동은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사회적/인종문제에 흑인사회의 축적된 감정이 한인을 상대로 표출된 사건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LA에서 살았고 주말마다 한인타운의 마켓에서 장을 봐온 나에게 그 3일간의 폭동사건촬영이 나의 대표적인 사진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하루에 100만부, 110면을 발행하는 L.A. Times의 1100명 편집국 기자들 중에서 그는 한국어를 가장 완벽하게 할 수 있고 사건현장인 L.A. 한인타운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자였다. 따라서 동료 기자들이 모르는 내용을 잡아내고 특종을 함으로써 퓰리처상 수상에 앞서 1992년에 먼저 사내(社內) 사진기자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1993 Pulitzer Prize in Spot News Coverage” 부문을 팀으로 수상했는데 이는 L.A.폭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을 찍은 그를 포함한 스텝들에게 주어졌다.

두 번째 퓰리처상은 1999년의 일이다. AP통신에서 제일 큰 사진부인 워싱턴 DC지국 사진부 책임자로 스카우트 되어서 L.A.에서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백악관/의회/국방부/국무부/재무부 등 워싱턴 사진을 총괄지휘하면서 1998년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 스캔들 사진을 내보냈다. 사진부의 책임자로서 직접 사진을 찍고, 데스크 책임자로서 팀원들의 사진취재를 지휘하며 실시간 사진을 고르고 사진캡션을 붙여 AP통신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그의 팀에게 상이 주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퓰리처상은 사진기자로서, 두 번째 퓰리처상은 사진부 데스크 책임자로서 스텝들과 함께 받았다.

그러나 퓰리처상의 사진들은 그의 긴 기자생활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1987년 민주화운동, 88서울올림픽, 1995년과 97년 북한, 미국 내에서 이라크 전쟁준비/진행, 9.11테러 등 그의 폭넓은 취재영역은 말 그대로 ‘세상은 넓고 사건은 많다’였다. 그가 학생기자 때부터 촬영한 대통령만 해도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포함 7명, 한국에선 전두환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6명이다. 항상 세계를 무대로 중요한 자리, 중요한 순간을 목격하고 기록해온 것이다.

이란 공격 준비중인 B-2 스텔스 폭격기, 2002년 ⓒ강형원

9.11 펜타곤 공격, 2001년 ⓒ강형원

값진 삶을 위하여

“저는 제 아들들에게 하루면 날릴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돈과 명예는 큰 가치가 없고, 우리가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이 가장 값지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아직 몇 년 더 남은 로이터통신에서의 정년퇴직에 앞서 서둘러 은퇴한 것도 이런 맥락일지 모른다. 50대 중반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족과 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나의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해마다 세 아들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던 자상한 아버지는 이제 가족 5명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들들이 성장하여 각자 바쁘게 활동하자 이제 자신도 주류언론에서 주어지는 과제(assignment) 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한 주제로 자신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서 늙거나 병들어 죽어 가는 지인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진은 그 소중한 시간을 영원히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을 찍어 낼 수 있고, 각각 자기만의 주관적인 삶의 경험에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사진을 통해 알게 됨으로써 인생이 바뀌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세계적인 통신사 소속의 기자라는 명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는데, 그 첫 번째 과제가 그의 정체성, 그의 세 아들의 정체성을 찾는 ‘뿌리 찾기’였다.

“저는 제 이름을 미국 이름으로 바꿀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양이 겨우 지난 2-300년 동안 산업과 과학혁명에서 조금 앞서 간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배우고 발음하는데,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이어온 윤택하고 우월한 문화적인 역사를 생각할 때 그들도 우리의 이름을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신문이나 잡지에 바이라인이 나갈 때 한국 이름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연대에 대한 기준이 길어졌다고 말한다. 선사시대 유적을 보면서 오천년 이상의 길고 오랜 세월을 연결해 온 고대 문명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데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사진작업이 바로 그런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타고난 진지함과 성실함, 문제 해결 능력으로 한국의 사진가가 하기에도 고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의 고대문화유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시각적으로 메시지 전달효과가 많은 문화재와 또한 주변문화와 차별화되는 우리문화의 특성을 중심으로 열성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부터 경주의 신라문화, 전라도와 강화도의 고인돌,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까지 지난 몇 개월간 그의 동선은 한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수준이다.

 
 

87년 6월 항쟁때 닭장차로 끌려가는 김영삼 / 87년 고대 학생집회에 참가한 DJ·YS / 북한 ⓒ강형원

사진으로 말하기

대학 졸업 이후 33년을 사진기자로 살아온 강형원, 그에게 사진은 모국어나 영어 이상으로 익숙한 언어다.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를 시각적인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 특히 사진을 통한 이야기가 감명 깊을 때는 더 강렬하고 잊지 못할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글도 그렇지만 사진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때는 사실에 근거하고 과장이나 왜곡을 조절할 줄 아는 고도의 사진문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다 보니, 제가 몰랐고 예상치 못한 많은 내용들을 계속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한국 역사와 문화는 제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분야였어요. 그래서 마음을 열고 꾸준히 배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북한, 만주 지역, 일본열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유산들을 차근차근 기회가 만들어지는 대로 기록할 계획입니다.”

그는 지금은 제주도에 머물며 제주해녀, 한라산, 제주 토종 제주개, 제주마 등 우리만의 문화적 특성이 드러나는 대상을 촬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그가 많은 자료를 연구해 찾아낸 새로운 발견도 있다. 우리가 그동안 우리의 것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부끄러움과 40여 년 넘게 미국 시민으로 살아온 그에게 빚지고 있다는 미안함이 들 정도로 그는 지난 1년간 왕성하게 발굴하고 기획하고 섭외하여 우리 땅 곳곳을 열성적으로 찾아다니며 사진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전 세계 어떤 민족과 상대하든, 자신만의 경쟁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관심 분야에서 자기 자신을 남들과 차별화 시키는 능력을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홀로 카메라에 의지하여 문화기록을 남기는 순례 길을 망설임 없이 고독하고 대담하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홈페이지(www.kang.org)를 살펴보다가 그를 후원하는 계좌가 있음을 발견하고 소정의 후원금을 보냈더니 그가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지금은 제가 후원을 받아야 할 때라서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지냈지만 솔직하고 당당한 이런 자세가 참 좋아 보인다. 항상 조금의 과장이나 허세가 없는 진지한, 너무나 진지한 그의 인성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가치 있는 일로 만드는 것 같다.

“공동묘지에서 가장 부자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은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업을 얻으려 너무 애쓰기보다 값진 인생추억을 위해 더 많은 꿈을 가졌으면 바란다고 말했다. 삶의 목표가 앞서고 직업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강형원, 그는 이제 직업적 성취까지 완수하고 또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출발했다. 오랜 세월을 가다듬은 노련한 사진가 강형원을 통해 드러날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그 아름답고 빛나는 숨결을 느끼고 싶다.

반구대 암각화, 2020년 ⓒ강형원

독도, 2020년 ⓒ강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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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원은 백악관에 초청받아 클린턴을 비롯하여 부시ㆍ오바마 대통령 등을 촬영했다.

강형원(1963- )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77년에 미국으로 전 가족 이민, 로스엔젤레스 UCLA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86년부터 2019년까지 L.A. Times, AP통신(The Associated Press), 로이터 통신사에서 사진기자와 사진편집데스크책임자로 일했다. 1987년 한국 민주화 현장, 1988년 서울올림픽, 1995, 97년 북한기근을 취재했고, 9.11테러, 미국수뇌부에서의 이라크 전쟁진행 등을 취재했다. 7명의 미국대통령과 6명의 한국대통령을 촬영했다. 1989년에는 한국의 민주화 현장을 촬영한 사진집 “From the Streets to the Olympics 1987-88”을 출간했다. | <월간 사진예술 202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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